티스토리 뷰
목차

용돈을 모아 산 게임잡지 번들에서 퇴마전설을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998년 출시 당시 대한민국 게임대상 멀티플레이 부문을 수상하고 이달의 게임상까지 받았던 이 작품은, 단순한 고전 게임이 아니라 한국 게임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지금도 가끔 꺼내 실행하다 보면 그 꼬마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 드는 건 저만의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한국형 디아블로라 불렸던 퇴마전설의 탄생
퇴마전설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게임잡지 번들에 끼워진 게임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실행하자마자 화면을 채우는 어두운 색감과 탑다운 시점이 뭔가 심상치 않았거든요.
퇴마전설은 트리거소프트가 1998년 9월에 발매한 액션 RPG입니다. 트리거소프트는 이 게임 이전에 충무공전, 장보고전, 임진록 같은 RTS, 즉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주로 개발하던 회사였습니다. 여기서 RTS(Real-Time Strategy)란 플레이어가 실시간으로 자원을 관리하고 유닛을 움직여 전투를 진행하는 전략 게임 장르를 의미합니다. 그런 RTS 전문 스튜디오가 만든 액션 RPG라는 점이, 나중에 게임을 깊이 파고들수록 이해가 되는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개발 배경에 대해 당시 트리거소프트 대표 김문규 씨는 "디아블로를 너무 재미있게 했고, 이런 게임을 꼭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디아블로풍의 어두운 분위기를 동양 판타지에 입히는 것. 그 결과물이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의 퇴마사가 힘을 합쳐 마왕을 쫓는 이 게임입니다.
참고로 퇴마전설은 트리거소프트 최초의 16비트 컬러 게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16비트 컬러란 화면에 표현할 수 있는 색상의 수가 약 65,536가지에 달하는 그래픽 방식으로, 이전 8비트 컬러의 256색에 비해 훨씬 풍부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 덕분에 그래픽 색감이나 배경 묘사가 당시 국내 게임 중에서는 꽤 수준급이었습니다.
- 1998년 9월 발매, 트리거소프트 개발
- 1998년 대한민국 게임대상 멀티플레이 부문 수상
- 출시 당월 이달의 게임상 선정
- 해외 로열티 3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억 4,000만 원) 달성
- 트리거소프트 최초의 16비트 컬러 게임
멀티캐릭터 조작, 디아블로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지점
"한국형 디아블로"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혼자 캐릭터 하나를 조종해서 던전을 파고드는 그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플레이해보니 퇴마전설은 그 틀을 꽤 다른 방향으로 비틀고 있었습니다.
퇴마전설의 핵심은 멀티 캐릭터 컨트롤 시스템입니다. 멀티 캐릭터 컨트롤이란 하나의 화면에서 플레이어가 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조작하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액션 RPG처럼 한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파티 전체를 직접 운영하는 개념입니다. 이게 생각보다 전략적인 깊이를 만들어냈습니다.
등장 캐릭터는 셋입니다. 한국인 이림은 근접 격투를 담당하는 탱커, 일본인 쿠사는 원거리 마법을 다루는 딜러, 중국인 레이닝은 지원 역할의 서포터로 구분됩니다. 각자 역할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어서 상황에 따라 누구를 전면에 세우고 누구를 뒤에서 지원하게 할지 계속 판단해야 합니다. 심지어 캐릭터를 각기 다른 맵으로 분산시켜 각자의 퀘스트를 동시에 수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구조는 훗날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MCC 시스템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2006년 서비스를 시작한 MMORPG인데, 한 플레이어가 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운영하는 방식으로 당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퇴마전설이 그보다 8년 앞서 같은 개념을 선보였던 셈입니다.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사실상 이 시스템의 시초로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충분히 타당합니다.
개발사 출신이 RTS 전문 스튜디오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설계가 더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자원 분배와 유닛 운영에 익숙한 개발 문화가 액션 RPG 기획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입니다. 김문규 대표 역시 "RPG이지만 전략적 플레이 요소를 적용해보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출처: 게임메카 유튜브 인터뷰).
트리거소프트가 담은 한국적 요소들
당시 PC 게임 시장은 솔직히 미국산, 일본산 타이틀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디아블로, 워크래프트, 파이널 판타지. 국산 게임이 설 자리가 그렇게 넓지 않았던 시절이었죠. 그 시절 트리거소프트가 일관되게 밀고 간 방향이 한국적 소재였다는 점은 지금 돌아봐도 꽤 의식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퇴마전설 자체도 동아시아 3국의 조합이라는 설정에서 한국적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신라계 귀족 출신 이림이 마왕 무에게 살해당한 뒤 부활해 복수에 나선다는 설정, 퇴마사(退魔師)라는 직업군 자체가 한국·동아시아 전통 문화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퇴마사란 악귀나 마물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무속 신앙과 도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개념입니다. 이 소재를 게임에 녹여낸 것은 해외 게임들과 명확한 차별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퇴마전설의 스토리 진행 방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션이 시간대별로 분기되어 특정 시간에 마을 주민이 의뢰를 요청하는 구조였는데, 이는 일반적인 퀘스트 로그 방식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게임의 이벤트 트리거 방식에 가깝습니다. 이벤트 트리거란 특정 조건이나 시점에 도달했을 때 자동으로 발동되는 게임 내 사건 장치를 의미합니다. 이 구조 덕분에 시간 관리가 공략의 핵심이 되었고, 단순히 강해지는 것만으로는 모든 퀘스트를 소화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요소는 DLC 방식의 추가 콘텐츠였습니다. DLC(Downloadable Content)란 게임 출시 이후에 별도로 제공되는 추가 콘텐츠를 뜻하는데, 퇴마전설은 게임잡지를 구매하거나 게임 패키지를 직접 사면 추가 미션을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이를 구현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도 꽤 독특한 방식이었고, 서점에서 잡지를 사면 게임 번들도 함께 얻었던 그 시절 유통 구조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퇴마전설을 처음 접한 것도 바로 그 게임잡지 번들 루트였으니까요.
PC챔프, PC파워진 같은 당시 게임 전문지들에는 독자들의 퇴마전설 플레이 체험담이 실리기도 했으며(출처: 게임메카 유튜브),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어 로열티 수입만 3만 달러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퇴마전설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 남은 이유
퇴마전설 이후로 시리즈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2편 부제는 '블러드 아리아'였는데, 1편에 대한 기대가 워낙 컸던 탓인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퇴마전설 2 소스를 활용해 만든 온라인 게임 '슬레이어즈 온라인'도 출시되었지만, 역시 1편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슬레이어즈 온라인을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혼자 플레이하던 퇴마전설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즐겼다는 경험 자체가 남아 있는 겁니다. 게임의 완성도보다 그 시절 함께 플레이하던 감각이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경우가 있잖습니다.
트리거소프트는 이후 로즈 온라인이라는 MMORPG를 개발했고, 이후 그라비티에 인수 합병되었습니다. 김문규 대표는 2014년 가원게임즈를 설립해 건쉽배틀과 워쉽배틀을 개발하며 현재까지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퇴마전설을 만든 손이 수십 년 후에도 게임을 계속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반갑습니다.
김문규 대표는 인터뷰에서 "개발자가 재미있게 개발하면 유저들도 그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실감시켜 준 타이틀"이라고 퇴마전설을 평했습니다. 개발 기간이 5개월 남짓이었고, 막힘없이 빠르게 개발한 몇 안 되는 게임이었다고도 했죠. 그 에너지가 게임에 고스란히 담겼고, 플레이어 쪽에서도 그게 느껴졌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게임들은 클리어하고 나서도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퇴마전설 지금도 플레이할 수 있나요?
A. 공식 재발매나 디지털 플랫폼 출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전 게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지금도 공략 게시물이 올라오고 플레이어가 있는 만큼, 방법을 찾는 분들은 레트로 게임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Q. 퇴마전설이 그라나도 에스파다에 영향을 줬나요?
A. 공식적으로 확인된 연관성은 없습니다. 다만 퇴마전설이 1998년에 멀티 캐릭터 동시 조작 시스템을 구현했고, 그라나도 에스파다가 2006년에 유사한 MCC 시스템으로 화제를 모은 만큼, 사실상 시초 격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Q. 퇴마전설 2편은 왜 1편보다 인기가 없었나요?
A. 1편이 워낙 강한 인상을 남긴 탓에 2편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던 것이 주된 이유로 꼽힙니다. 2편 자체의 완성도 문제라기보다는, 1편이 만들어놓은 높은 기준을 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Q. 퇴마전설 캐릭터 중 누구로 시작하는 게 좋나요?
A. 처음 플레이한다면 근접 전투 담당 이림으로 탱킹 역할을 맡기고, 나머지 두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는 방식이 비교적 수월합니다. 마법 캐릭터 쿠사는 초반에 강한 마법을 배우기 전까지 레벨업이 까다로우므로 어느 정도 게임에 익숙해진 후 집중 육성하는 편이 좋습니다.
결론
용돈을 모아서 산 잡지 한 권, 그 안에 끼어 있던 CD 한 장에서 시작한 인연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그 꼬마 시절에는 몰랐습니다. 퇴마전설은 한국형 디아블로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실제로 해보면 전략 시뮬레이션의 DNA가 액션 RPG 외피를 입고 있는 꽤 독특한 물건이었습니다.
지금 처음 퇴마전설을 알게 된 분이라면, 단순히 고전 게임 체험이 아니라 1990년대 한국 게임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개성을 만들어가려 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접근해보시길 권합니다. 그 시절 게임잡지를 뒤적이던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 더 꺼내볼 이유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