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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형 집에서 처음 봤을 때 눈을 의심했습니다. 분명 전략 시뮬레이션인데, 유닛들이 전부 3D로 움직이고 있었거든요. 1997년, 스타크래프트조차 아직 나오지 않았던 그 시절에 말입니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그렇게 저한테 처음 찾아왔습니다.
개발사 Cavedog, 아동용 게임 회사에서 나온 전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을 만든 Cavedog Entertainment는 1995년에 설립된 스튜디오입니다. 모회사인 Humongous Entertainment가 어린이 교육용 게임을 만들던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처음엔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나중에 이 배경을 알았을 때 한동안 믿기지 않았습니다.
Humongous Entertainment의 대표작은 국내에서도 제법 알려진 프레디 피시(Freddi Fish) 시리즈입니다. 프레디 피시란 1994년부터 출시된 어린이용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로, 해외에서는 꽤 오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회사의 자회사 스튜디오가 육해공 전면전을 구현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Cavedog은 모회사의 모회사인 GT Interactive의 재정난으로 인해 2000년 해산했습니다. 고작 5년의 수명이었죠. 해산 당시 세 개의 타이틀이 개발 중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게 어떤 게임이었을지는 지금도 종종 궁금해집니다. Humongous Entertainment 역시 2005년 문을 닫았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강렬한 유산을 남긴 스튜디오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배경만 보면 미심쩍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의외성이 이 게임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선입견 없이 최선을 다해 만들었기에, 도리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결과물이 나온 게 아닐까요.
게임성, 1997년에 이미 완성된 물량전의 미학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RTS(Real-Time Strategy), 즉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입니다. 여기서 RTS란 플레이어가 게임이 진행되는 실시간 흐름 속에서 자원 수집, 기지 건설, 유닛 생산과 전투를 동시에 수행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같은 시기 스타크래프트와 비교되기도 했지만, 두 게임은 발매 시기도 1년 차이밖에 나지 않고 방향성도 전혀 다릅니다.
이 게임의 핵심은 물량전입니다. 자원은 금속과 에너지 두 종류로 나뉘는데, 금속은 매장지에 추출기를 설치해서, 에너지는 발전기를 건설해서 확보합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핵융합 발전기를 통해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이 가능해지고, 그걸 바탕으로 끝없이 유닛을 생산해 전선에 밀어 넣는 구조입니다. 이 소모전의 흐름을 유지하고 밀어붙이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제가 직접 플레이해보니, 건설 유닛을 추가로 붙여 건물 건설 속도를 올리는 시스템이 생각보다 전략적 깊이를 크게 늘려줬습니다. 심지어 생산 시설에 건설 유닛을 붙이면 유닛 생산 속도까지 올릴 수 있으니, 후반 경제 운영이 꽤 섬세해집니다.
장사정포(Long-Range Artillery)라는 개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장사정포란 시야 범위를 넘어서 원거리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고정식 포격 유닛을 말합니다. 레이더로 적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시야 바깥의 목표에 예측 사격을 가하는 전술이 유효한 게임은 당시로서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 경험상 장사정포가 적 기지에 닿는 거리 안에 자리잡는 순간, 게임의 흐름이 확연히 바뀌는 게 느껴졌습니다.
- 보병, 케이봇, 차량, 비행기, 선박 등 다양한 유닛 계열
- 티어 업 시스템: 고등급 건설 유닛 생산 → 고등급 시설 건설 순으로 발전
- 파괴된 유닛의 잔해를 금속 자원으로 재활용 가능
- 핵미사일과 요격 미사일을 자원이 허락하는 한 무제한 생산 가능
- 지휘관(Commander) 유닛은 D-Gun이라는 전용 무기로 적을 일격에 분해
마이크로 컨트롤보다 어택땅에 가까운 전투 방식이 단점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게 이 게임의 정체성이라고 봅니다. 물량이 맞붙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였으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구경만 하는데도 전혀 질리지 않았습니다.
풀 3D 그래픽, 시대를 앞선 비주얼의 충격
사촌 형 집에서 처음 이 게임을 봤을 때, 전략 게임이라는 사실보다 3D라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1997년은 3D 그래픽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전략 게임은 2D 스프라이트, 즉 평면 이미지 위에 픽셀로 그려진 유닛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유닛 하나하나가 전부 폴리곤(Polygon) — 3D 형태를 구성하는 다각형 면의 집합 — 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비행기 유닛들의 움직임은 지금 봐도 감탄스럽습니다. 전투기들은 실제 도그파이트처럼 선회하며 교전하고, 폭격기는 목표 지점까지 일직선으로 폭격 경로를 유지합니다. 이후에 나온 어떤 RTS도 비행 유닛에서 이 정도의 물리적 움직임을 구현하진 못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제가 직접 수십 년 뒤 다시 플레이해봤을 때도, 비행 유닛의 기동만큼은 여전히 놀라웠습니다.
다만 사양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높았습니다. 맵 선택 화면에서 맵마다 권장 RAM 용량이 표시될 정도였으니까요. 집 컴퓨터 사양이 썩 좋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를 졸라 패키지를 사서 돌려봤습니다. 유닛 수가 많아지면 버벅이는 현상이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풀 3D로 이 스케일의 전투를 돌리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전체적인 최적화는 굉장히 잘 된 편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나노머신(Nanomachine) 건설 연출도 인상적이었는데, 나노머신이란 설정상 미세한 기계 입자들을 뿌려 구조물이나 유닛을 조립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건물이나 유닛이 녹색 입자를 흩뿌리며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는 장면은, 게임의 SF 설정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이었습니다.
사운드트랙, 전투를 음악으로 완성한 오케스트라
좋은 게임에는 좋은 음악이 따라옵니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CD 사운드트랙으로 녹음된 오케스트라 음악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CD 사운드트랙이란 게임 데이터가 아닌 별도의 오디오 트랙으로 음악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당시 기준으로 가장 높은 음질을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각 곡은 전투 상황에 맞게 흘러나옵니다. 전투가 격화될수록 웅장함이 올라오는 구성인데, 저는 지금도 그 멜로디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딘가에서 비슷한 오케스트라 편성이 들리면 자동으로 이 게임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한 곡 한 곡이 그냥 BGM이 아니라 명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입니다.
작곡가 Jeremy Soule의 이름을 이 게임으로 처음 알게 된 분들도 많을 겁니다. 그는 이후 스카이림(The Elder Scrolls V: Skyrim)을 비롯한 수많은 대작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했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었습니다(출처: Wikipedia - Jeremy Soule).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들으면 음악이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사운드트랙이 훌륭하지 않다는 의견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만, 간혹 게임 음악이라 가볍게 넘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 경험상 이 게임의 음악은 전투 장면과 함께 들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물량전이 벌어지는 화면 위로 오케스트라가 쏟아지는 순간은, 이 게임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한 번은 꼭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지금도 할 수 있나요?
A. 네, 스팀(Steam)에서 정식으로 구매해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저도 패키지 CD를 잃어버린 이후 스팀에서 다시 구매해 지금도 가끔 즐기고 있습니다. 현대 운영체제에서도 큰 문제 없이 실행되는 편입니다.
Q. 스타크래프트랑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중 뭐가 더 재밌나요?
A. 두 게임은 방향성이 완전히 다릅니다. 스타크래프트가 마이크로 컨트롤과 빠른 판단력을 요구한다면,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대규모 물량전과 기지 운영에 집중합니다. 어느 쪽이 낫다기보다, 어떤 플레이 스타일을 좋아하느냐의 문제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Q. 코어랑 암 진영 중 뭘 골라야 하나요?
A. 두 진영의 차이는 미묘한 편입니다. 유닛 디자인과 세부 스펙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플레이 방식 자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처음이라면 어느 쪽을 골라도 무방하고, 여러 번 플레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취향이 생기게 됩니다.
Q. 요즘 컴퓨터에서도 잘 돌아가나요?
A. 현재 기준으로 사양 부담은 전혀 없습니다. 당시 맵 선택 화면에서 권장 RAM 용량을 표기했을 정도로 고사양이었지만, 기가바이트 단위 RAM이 기본인 지금은 그런 제약이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운영체제 호환성을 위해 스팀 버전 사용을 권장합니다.
결론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단순히 "옛날에 잘 만든 게임" 정도로 기억할 작품이 아닙니다. 1997년에 이미 풀 3D 유닛, 오케스트라 사운드트랙, 대규모 물량전 시스템을 구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게임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Cavedog이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남긴 결과물이라고 하면,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어떤 작품을 내놓았을지 아쉬움이 깊어집니다.
지금도 스팀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고전 RTS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분이라면, 혹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분이라면, 한 번 다시 실행해보시길 권합니다. 게임 역사에서 이 정도 위치에 있는 타이틀을 모르고 지나치는 건 꽤 아까운 일입니다(출처: Steam - Total Annihilation).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xc9tOUehwI&list=PL0s9YEORmzG5RPxpmXF2cBjbL1P9HXmzU&index=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