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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디선가 들려오던 그 소리, 기억하시나요? "싱가!"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 속 선수들이 나자빠지던 장면. 저는 그 광경을 처음 봤을 때 축구 게임이 이래도 되나 싶었습니다. 1985년 첫 출시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오락실을 평정했던 테크모 월드컵 시리즈, 그 찬란했던 전성기와 한 번의 선택으로 무너진 결말을 직접 플레이했던 기억과 함께 풀어봅니다.
황금기: 트랙볼 하나로 오락실을 뒤집다
1985년 11월 일본 오락실에 처음 등장한 테크모 월드컵은 당시 기준으로 꽤 파격적인 방식을 들고 나왔습니다. 조이스틱 대신 트랙볼(Trackball)을 조작 장치로 채택한 건데요. 트랙볼이란 커다란 구슬 모양의 광학식 입력 장치로, 마우스 밑에 있던 볼을 위로 꺼내놓은 형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손바닥으로 세게 굴리면 선수가 전력 질주하고, 살살 굴리면 부드럽게 드리블하는 아날로그 감각이 디지털 조이스틱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물리적 쾌감을 줬습니다.
사실 테크모는 이 트랙볼을 처음부터 축구에 쓴 게 아닙니다. 1985년 6월에 먼저 내놓은 미식축구 게임 그리드 아이언 파이트(Gridiron Fight)에서 먼저 시도했지만, 룰이 복잡한 미식축구는 동전 하나로 즉각적인 쾌감을 원하는 오락실 유저들에게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았습니다. 테크모는 실패에 주저앉기는커녕 트랙볼이라는 조작 방식 자체는 먹힌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훨씬 직관적인 축구로 장르를 바꿨습니다. 그 판단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죠.
이듬해인 1986년 1월 전 세계로 영토를 넓힌 테크모 월드컵은 마라도나가 세상을 뒤흔들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타이밍까지 딱 맞아떨어지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1986년 2월 일본 게임 전문지 게임 머신(Game Machine)이 발표한 테이블 아케이드 게임 순위에서 3위를 기록했고, 1986~1987년 매출 순위에서도 꾸준히 4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오락실 주변에는 늘 구경꾼들이 바글거렸고, 핏대를 세우며 트랙볼을 굴려대는 두 사람의 대결은 그 시절 오락실을 상징하는 풍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단점도 있었습니다. 승부에 눈이 먼 유저들이 하루 종일 트랙볼을 굴려대는 바람에 기계 안의 롤러와 광학 센서가 상상 이상의 속도로 닳았고, 수리비가 오락실의 발목을 꾸준히 잡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테크모는 약 4년 뒤 8방향 레버와 버튼 조합의 정통 조작 방식을 채택한 테크모 월드컵 90을 출시하며 시스템 전반을 뜯어고쳤습니다. 언뜻 혁신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누구라도 동전만 있으면 바로 앉아서 즐길 수 있는 접근성의 극대화였습니다.
- 1985년 11월: 트랙볼 조작 방식으로 일본 오락실 첫 등장
-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시즌과 맞물려 전 세계 폭발적 인기
- 1989년 7월: 테크모 월드컵 90 출시, 조이스틱 방식으로 전환 및 접근성 확대
- 1990년대: 메가드라이브·패미컴 등 가정용 콘솔 이식으로 시리즈 인기 극대화
필살기: 바나나킥과 싱가, 밸런스 따위는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테크모 월드컵을 플레이할 때 항상 브라질로 시작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기보다는, 싱가(Scissors)와 바나나킥이라는 두 가지 필살기가 너무 강력해서 다른 나라를 굳이 고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싱가란 콜롬비아와 브라질이 사용하던 시저스 킥(Scissors Kick) 계열의 기술로, 수비수들이 속수무책으로 넘어지는 무력화 기술입니다. 쉽게 말해 상대 수비진 전체를 낙엽 떨어뜨리듯 제거하는 일종의 무적 돌파기였습니다.
이 기술로 수비진을 정리한 뒤 바나나킥(Banana Kick)을 꽂아 넣으면 대부분 골이 됐습니다. 바나나킥이란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 들어가는 커브 슛인데, 이 게임에서는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궤적으로 골문 구석을 파고들었습니다. 당시 피파(FIFA) 시리즈나 버추어 스트라이커(Virtua Striker)가 패스 한 번에도 현실적인 물리 연산을 적용하며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1996년에는 격투 게임 명가 SNK의 MVS 기판을 가져와 화질과 음향을 대폭 끌어올린 테크모 월드 사커 96을 출시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는 시리즈 최초로 3D 그래픽을 도입한 테크모 월드컵 98을 선보였습니다. MVS 기판이란 SNK가 네오지오 아케이드용으로 만든 고성능 기판으로, 당시 오락실 게임 중 그래픽 성능이 최상위권이었습니다. 3D로 넘어오면서도 테크모 월드컵 98은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뚝뚝 끊기는 볼 터치와 어색한 선수 움직임을 두고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제가 직접 플레이해보니 그 단점보다 필살기 한 방의 쾌감이 훨씬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나라별 필살기 시스템을 조금 더 살펴보자면, 브라질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게 된 뒤 저는 일본 팀도 자주 선택했습니다. 일본은 슈퍼 스루패스(Super Through Pass)와 슈퍼 세이브(Super Save)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슈퍼 스루패스란 간결한 패스 한 방으로 상대 수비 라인을 통째로 뚫고 공격수 발 앞에 공을 떨어뜨리는 기술입니다. 브라질의 싱가+바나나킥 콤보와는 결이 달랐지만, 슈퍼 스루패스로 공간을 만든 뒤 슛을 연결하면 꽤 높은 확률로 득점이 가능했습니다. 특히 슈퍼 세이브는 상대방이 브라질을 골랐을 때 바나나킥을 막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대응책이었기 때문에, 브라질 유저가 많은 오락실에서는 일본이 아주 훌륭한 카운터픽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팀 간 밸런스(Balance)가 훌륭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밸런스란 게임 내 각 팀이나 캐릭터의 능력치가 공정하게 조율된 정도를 의미하는데, 테크모 월드컵의 팀 밸런스는 솔직히 말해 개판이었습니다. 브라질처럼 기본 능력치도 높은데 사기 필살기까지 갖춘 팀이 있는가 하면, 필살기도 없고 스탯도 바닥인 팀도 버젓이 선택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균형이 오히려 이 게임의 매력이었습니다. 메타크리틱(Metacritic)은 후속작인 폭축구(Super Soccer)에 100점 만점 중 70점을 부여했는데, 그 평가가 "밸런스는 부실하지만 전반적으로 재미있는 게임"이었다는 점이 이 시리즈의 성격을 잘 요약해줍니다.
몰락: 리얼리즘을 따라가다 두 의자 사이에 빠지다
테크모 월드컵 98이 오락실을 평정하고 나서 유저들은 자연스럽게 차기작을 기대했습니다.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 솔직히 이번에는 로켓 달린 축구화라도 등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시된 테크모 월드컵 밀레니엄(Techmo World Cup Millennium)은 예상과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싱가도 없고, 바나나킥도 없고, 필살기 자체가 사라진 진지한 축구 시뮬레이션(Soccer Simulation)으로 등장했습니다. 여기서 축구 시뮬레이션이란 실제 축구의 전술, 패스, 물리 법칙을 최대한 재현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개발팀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인터뷰나 공식 발표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시기 3D 그래픽과 부드러운 물리 엔진을 앞세운 세가의 버추어 스트라이커 시리즈와 피파 시리즈가 시장을 장악하던 흐름을 보면, 테크모 역시 리얼리즘 노선을 따라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기감에 억지로 방향을 튼 것이 아닐까 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봅니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테크모 월드컵의 본질적인 재미가 복잡한 머리싸움이나 리얼한 물리 연산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개발진이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밀레니엄은 기존 팬들에게는 배신으로 다가왔고, 리얼리즘을 원하는 유저들에게는 피파나 버추어 스트라이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어중간한 게임으로 비쳤습니다. 두 의자 사이에 앉으려다 바닥으로 떨어진 셈입니다. 결국 밀레니엄의 흥행 실패로 테크모 월드컵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를 타고 테크모 월드컵 98 개발진이 다시 뭉쳐 폭축구(한국·일본 출시명)를 내놓으며 원초적 아케이드성을 복원하려 했습니다. 폭축구에서는 게이지를 모아야만 필살기를 쓸 수 있는 구조를 도입해 무한 난사 문제를 어느 정도 잡았고, 중국의 만리장성 소환, 미국의 로켓 슛 등 한층 더 황당한 연출로 방향을 극단까지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밀레니엄이 남긴 상처가 깊었는지, 예전의 열기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경쟁작들이 90분짜리 축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가는 동안 테크모 게임은 끝까지 3분짜리 판타지 액션 블록버스터를 고집했고, 그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지만 한 번 흔들린 브랜드 신뢰를 회복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테크모 월드컵 98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어디인가요?
A. 브라질이 가장 많이 선택됐던 것은 사실입니다. 싱가로 수비진을 무력화한 뒤 바나나킥을 꽂는 콤보가 쿨타임도, 횟수 제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브라질에 대한 카운터로 일본의 슈퍼 세이브가 유효하다는 시각도 있어서, 상대방이 무엇을 고르느냐에 따라 최선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테크모 월드컵 밀레니엄은 왜 망했나요?
A. 시리즈 특유의 필살기와 아케이드 속도감을 모두 걷어내고 실제 축구에 가까운 시뮬레이션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기존 팬들에게는 배신이었고, 리얼리즘을 원하는 유저들에게는 피파나 버추어 스트라이커보다 완성도가 낮은 게임으로 평가받으며 양쪽 모두에게 외면당했습니다.
Q. 폭축구(Super Soccer)는 테크모 월드컵 98과 같은 게임인가요?
A. 같은 개발진이 만든 후속 외전작이지만 다른 게임입니다. 폭축구는 2002년 플레이스테이션 1용으로 발매됐으며, 98 버전의 아케이드성을 계승하되 필살기에 게이지 시스템을 도입해 무한 난사 문제를 개선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불법 유통 과정에서 테크모 월드컵 98 표지로 둔갑해 팔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Q. 테크모 월드컵 98의 승부차기가 불공평하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A. 오락실에서 직접 경험해보신 분들 중에는 AI 골키퍼가 내가 차는 방향을 귀신같이 읽는다고 느낀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오락실 꼬마들 사이에서는 동전을 더 먹기 위해 기계를 조작한다는 말이 돌았는데, 이는 확인된 사실은 아니고 승부차기의 AI 설계가 유저에게 불리하게 구성된 데서 비롯된 불만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결론
테크모 월드컵 시리즈는 트랙볼이라는 낯선 입력 장치에서 시작해 조이스틱으로 전환하고, 필살기 시스템으로 전성기를 누리다가 단 한 번의 방향 전환 실수로 막을 내린 게임입니다. 밀레니엄의 실패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포기하고 남들을 따라가려 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브라질을 고르고 싱가와 바나나킥을 연속으로 쓰던 그 손맛이 생각납니다. 밸런스가 엉망이고 실제 축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레트로 아케이드 게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에뮬레이터나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한 번 직접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처음 싱가를 성공시키는 순간 왜 이 게임이 오락실을 평정했는지 바로 이해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