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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RPG의 시작을 한 학생 팀이 만들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1994년, 인천의 컴퓨터 가게 뒷방에서 고등학생들이 만든 게임이 약 10만 장 넘게 팔리며 국내 패키지 게임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저도 처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접했을 때는 그냥 옛날 게임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해보고 나서 이게 왜 아직도 회자되는지 바로 알았습니다.
학생들이 만든 게임이 국민 RPG가 된 이유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를 명작이라고 하면, 대부분 "그래도 30년 전 게임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래된 게임은 기술적 한계 때문에 스토리도 얕고 캐릭터도 단순할 거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직접 플레이해보고 그 편견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이 게임은 고등학생 몇 명이 톨킨 세계관에서 영감을 받아 만화로 먼저 구상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다 "이걸 게임으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한마디가 손노리의 시작이 됐죠. PC 통신 하이텔을 통해 데모 버전이 배포됐고, 입소문만으로 전국 게이머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인디 게임이 바이럴을 탄 셈입니다.
당시 RPG(Role-Playing Game)라는 장르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쉽게 말해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성장시키며 스토리를 직접 체험하는 방식인데, 그 시절 대부분의 게임은 일어나 영어로만 즐길 수 있어서 진입 장벽이 높았죠.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제작된 최초의 상업용 패키지 RPG였고, 결국 추정 판매량 약 10만 2,000장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습니다(출처: 한국게임산업협회).
스토리 구조도 단순한 선악 구도를 벗어났습니다. 악당 브림 힐트는 엘프 왕국을 침략한 라테인 제국에게 모든 것을 잃은 피해자였고, 그 절망이 그녀를 타락하게 만든 것이었죠. 주인공 로이드가 소속된 라테인 제국 자체가 침략자라는 설정은 당시 게임에서 보기 드문 반전이었습니다. 저도 게임을 진행하면서 "이쪽이 사실 나쁜 놈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이 게임의 가장 영리한 부분이었습니다.
- 1994년 국내 최초 상업용 패키지 RPG 출시, 추정 판매량 약 10만 2,000장
- PC 통신 하이텔 데모 배포 → 입소문으로 전국 확산된 바이럴 구조
- 피해자가 악당이 되는 비극적 서사 — 당시 국내 게임에서 보기 드문 스토리텔링
- 전투, 대사, 유머까지 100% 국내 제작 — 완전 한국어 RPG의 첫 사례
전투 시스템, 직접 써보니 알려진 것과 달랐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전투는 흔히 SRPG(Strategy Role-Playing Game) 방식이라고 소개됩니다. 여기서 SRPG란 캐릭터를 맵 위에서 직접 이동시키며 위치와 순서를 고려해 싸우는 전략형 RPG를 의미합니다. 파이어 엠블렘이나 랑그릿사 같은 장르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SRPG라고 하면 지형 효과나 유닛 간 상성 같은 전략 요소가 핵심이라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플레이해보니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그 수준까지 구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지형 효과도 없고, 바위에 아군 캐릭터가 끼어버리는 버그도 꽤 자주 생겼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첫 전투에서 렌달프가 지형에 막혀 멍하니 서 있을 때는 '이게 맞나?' 싶었거든요.
그럼에도 전투가 재미없다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마우스가 아닌 키보드로 캐릭터를 직접 이동시키며 공격과 스킬 사용 명령을 내리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꽤 신선했고, 적을 어떻게 둘러싸느냐에 따라 전투 흐름이 달라지는 맛이 있었습니다. 심볼 인카운트 방식, 즉 필드에 적이 눈에 보이게 배치되어 있어서 피할지 맞붙을지 플레이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구조도 당시엔 보기 드문 요소였습니다.
마법 시스템(Magic System)은 아쉬움이 컸습니다. 마법 시스템이란 캐릭터가 MP(마나 포인트)를 소모해 특수 능력을 사용하는 구조인데, 이 게임에서는 MP 소모가 지나치게 커서 자주 쓰기 어려웠고 광역 마법은 아군에게도 피해를 줘서 실전에서 거의 활용을 못 했습니다. 제 경험상 초중반을 지나면 마법은 거의 손을 놓게 되고 물리 공격으로만 밀고 나가는 패턴이 굳어집니다.
또 하나, 레벨 노가다가 사실상 필수입니다. 레벨 노가다란 같은 전투를 반복해 캐릭터 능력치를 강제로 끌어올리는 과정을 말하는데,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구간마다 몬스터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가서 레벨을 채우지 않으면 다음 스테이지 진입 자체가 막힙니다. 제 경험상 웨스트 스톤 마을 훈련소를 적극 활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 필드에서 적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훈련소에서 반복 전투를 하는 쪽이 레벨업 속도가 눈에 띄게 빠릅니다.
30년 후 리파인, 이번엔 진짜 달라질 수 있을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가장 큰 불편함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진행 방향 힌트 부재를 들겠습니다.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제가 직접 플레이할 때도 공략집 없이는 중간중간 진행이 완전히 막혔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UX(User Experience), 즉 플레이어가 게임을 얼마나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는가의 측면에서 심각하게 불친절한 설계입니다.
2005년에 나온 리메이크작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R은 이런 부분을 개선할 기회였지만, PSP 버전에서 반복적인 구성과 높은 난이도로 팬들의 아쉬움을 샀습니다. 2006년 모바일 버전, 2008년 PSP판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도 기대에 못 미쳤고, 2014년 모바일 TCG(Trading Card Game) 어스토니시아 VS는 출시 1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습니다. TCG란 카드를 수집하고 덱을 구성해 대전하는 장르인데, 원작 팬들이 기대한 방향과는 거리가 있었죠(출처: 게임물관리위원회).
그리고 2025년 겨울, 대원미디어가 어스토니시아 30주년을 맞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파인을 출시 하였습니다. 원작 스토리와 감성을 살리면서 현대적인 비주얼과 시스템을 보강한다는 방향인데, 이전 후속작들이 번번이 기대를 밑돌았던 만큼 이번엔 어떨지 솔직히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직접 플레이를 해본 결과 스킬 활용도의 상승과 그로인한 전략성이 높아진 점 및 용병시스템의 도입으로 지루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없애 보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 외에는 만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로이드는 제가 생각하는 RPG 주인공 이미지와는 달랐습니다. 강하고 무결한 영웅이 아니라, 적에게 당하기도 하고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동네 형 같은 캐릭터였죠. 그 인간적인 매력이 너무 무거울 수 있는 복수극 서사를 라이트하게 만들어줬고, 덕분에 플레이하는 내내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완성도가 완벽한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공략집 없이는 진행이 막히고, 레벨 노가다를 피할 수도 없었죠. 그런데도 다시 하게 되는 건, 그 불편함조차 그 시절 고민하고 찾아다니던 기억과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원작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초반에 동료 장비를 로이드에게 몰아주고 브로드 소드 두 자루로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웨스트 스톤 훈련소 레벨업도 꼭 챙기시고요. 그렇게 하면 초반 진입 장벽이 훨씬 낮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