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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피 디스크 네 장. 그게 전부였습니다. 1.44MB짜리 디스크 네 장 안에 바다와 대륙, 무역과 전쟁이 모두 들어 있었고, 저는 그 안에서 세계 지리를 통째로 외웠습니다. 공부는 못해도 사회과부도는 항상 옆에 두고 살았던 그 시절, 대항해시대 2가 만들어낸 마법 같은 이야기입니다.
세계지리가 머릿속에 박힌 이유, 항해 시스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게임을 하다가 지리 공부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대항해시대 2는 1993년 코에이(KOEI)가 개발해 일본에서 출시했고, 국내에는 1995년 한글 도스판으로 정식 발매되었습니다. 플로피 디스크(Floppy Disk) 네 장, 용량으로 따지면 총 5.76MB에 불과했습니다. 플로피 디스크란 자성 필름이 입혀진 얇은 원판을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은 초기 휴대용 저장 매체로, 지금의 USB 이전에 쓰이던 방식입니다. 요즘 스마트폰 사진 한 장보다 작은 용량 안에 대서양, 인도양, 지중해가 전부 담겨 있었죠.
게임 내 항구 이름 대부분은 실제 지명 그대로였습니다. 세비야, 제노바, 알렉산드리아, 캘리컷. 저는 이 이름들을 지도에서 찾아가며 플레이했고, 덕분에 지금도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위치를 대강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학교 지리 시험보다 이 게임이 먼저 가르쳐준 것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항구는 처음부터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직접 바다를 개척하며 새 도시를 찾아야 했고, 풍향(風向)과 조류(潮流)까지 감안해서 항로를 잡아야 했습니다. 풍향이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뜻하는데, 게임 안에서 역풍을 맞으면 배의 속도가 뚝 떨어지기 때문에 항해 전에 계절과 지역별 바람의 방향을 외워두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었습니다. 저는 이걸 대비하려고 1월부터 12월까지 영어 월 이름을 통째로 외워 버렸습니다. 당시 영어 단어 하나 제대로 모르던 초등학생이었는데도요.
게임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여섯 명입니다. 각자 출신, 목표, 시작 조건이 전부 다릅니다.
- 조안 페레로: 균형 잡힌 능력치, 동료 셋과 시작. 입문자에게 적합한 탐험형 루트
- 카탈리나 에란초: 강력한 전투 능력, 해적 노선. 초반부터 강한 배로 시작하는 전투형 루트
- 피에트로 콘티: 보물 지도를 퍼즐처럼 풀어가는 모험형 루트
- 에르네스트 로페스: 세계 지도 완성이 목표인 탐험·자유도 특화 루트
- 오토 스피노라: 명예와 전략 중심의 전투·외교형 루트
- 알 데자스: 순수 교역 중심의 상업형 루트. 전투 능력이 낮아 난이도가 높음
제가 처음 선택한 건 조안 페레로였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중엔 카탈리나를 골라서 처음부터 해적 플레이를 하는 녀석도 있었고, 그걸 보고 다음 회차엔 저도 따라서 해봤습니다. 같은 게임인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인도까지 이어지는 항로가 머릿속에 지도처럼 새겨졌습니다.
무역시스템이 가르쳐준 것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무역이었습니다. 특산품을 사서 비싸게 파는 구조인데, 막상 해보면 이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항해시대 2의 무역시스템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Law of Supply and Demand)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구조였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란 같은 물건이라도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이 내려가고 공급이 줄면 가격이 오르는 시장의 기본 원리입니다. 같은 항구에서 같은 물건을 반복해서 사들이면 시세가 오르고, 오래 방치하면 시세가 다시 내려갔습니다. 저는 이걸 게임 안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처음으로 이해했습니다. 교과서에서 수요와 공급을 배운 건 훨씬 나중이었는데,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던 셈이죠.
제가 직접 써봤는데, 초반에는 향신료나 비단처럼 단가가 높은 품목을 무턱대고 실어 나르다가 쪽박을 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세 변동 폭이 크다는 건 잘못 읽으면 손해도 크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빈 공책에 항구별 특산물과 매입·판매 가격을 적어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페이지를 넘겨가며 무역 루트를 설계할 수 있게 됐고, 그 공책을 친구들한테 복사해서 나눠줬을 때의 뿌듯함이란 지금도 기억납니다.
게임 산업 연구 관점에서도 이 구조는 주목받아 왔습니다. 게임 기반 학습(Game-Based Learning), 즉 GBL이란 게임의 몰입성과 피드백 구조를 활용해 특정 개념이나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교육 방식인데, 대항해시대 2는 출시 당시부터 이 방식을 자연스럽게 구현한 사례로 꼽힙니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의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90년대 시뮬레이션 게임을 경험한 세대에서 경제 개념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당시에는 게임잡지 부록으로도 이 게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 공략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모르는 항구 이름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놀이이자 커뮤니티였습니다. 그 공략 노트는 인터넷 어디서 찾은 것보다 훨씬 믿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직접 확인한 내용이었으니까요.
명작고전게임으로 기억되는 이유
대항해시대 2가 명작으로 남은 건 단순히 재미있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목표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픈 월드(Open World) 방식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오픈 월드란 정해진 순서 없이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는 게임 구조를 말합니다. 대항해시대 2는 이 개념을 1990년대 중반에 이미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탐험만으로 엔딩을 볼 수도 있었고, 무역만으로 자본을 축적해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해도 나만의 항해가 만들어졌죠.
반면 후속작들은 그 감각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3, 4까지는 방향성이 분명했지만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정체성이 흐려졌고, 2022년 출시된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2의 주인공과 배경을 차용한 MMO 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로 등장했습니다. MMO RPG란 수천 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하나의 온라인 세계에서 플레이하는 롤플레잉 게임 장르입니다. 원작의 전략적 밀도와 탐험의 텐션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게임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리메이크보다는 재해석에 가까웠고, 원작 팬들에게는 반갑고도 아쉬운 타이틀이었습니다.
한국게임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90년대 코에이 시뮬레이션 장르는 국내 PC 게임 시장에서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강력한 브랜드 충성도를 형성했으며, 대항해시대 2는 그중에서도 세대를 넘어 회자되는 타이틀로 분류됩니다(출처: 한국게임학회).
대항해시대 2는 저에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건의 가치가 왜 달라지는지, 그리고 스스로 길을 찾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를 처음으로 가르쳐준 경험이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BGM이 귀에 맴돌 때면, 사회과부도를 펼쳐두고 볼펜으로 항로를 그리던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빈 노트를 공략집으로 만들어 가던 시절. 대항해시대 2는 그렇게 한 세대의 지리 감각과 경제 감각을 동시에 키워준 게임이었습니다.
처음 항구를 벗어나는 순간 그 설레는 감각은, 수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겁니다.